문화예술교육의 내부 혁명을 위하여

 

 

김종길 | 미술평론가.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예술사) 교수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에서 ‘문화예술’은 교육의 부재를 확인하는 ‘반짝 이벤트’ 프로그램이 된 지 오래다. 교육철학이 피폐한 학교나 사회에서 문화예술은 깜짝 쇼를 펼치거나 흥미유발 서커스를 위해 초대되니까. 그나마 이벤트의 감동수치가 높은 프로그램은 주 단위 혹은 월단위로 기획되기도 하지만, ‘시범성’ 프로그램은 근력강화 주사로 핏대를 세운 차력사들처럼 한 순간에 ‘문화예술교육’의 황홀경을 펼쳐내야 한다. ‘특종, 놀라운 세상’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사건을 일상처럼 기획해야 하는 곳이 현재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이다.


학교에서 교양학습이나 특별학습도 아닌 지친 뇌 근육 활성화를 위한 찰나의 이벤트가 될 때 문화예술은 수치심도 없는 뻔뻔한 돈벌이가 된다. 사회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불려가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노래하고 입방정을 놀릴 때 문화예술은 앵벌이가 된다. 문화예술은 새 천년의 시대령을 넘어 와 그렇게 ‘분식교육’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추방당한 문화예술교육이 정부주도의 정책 속에서 정부에 의한 정부를 위한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정부에 더부살이하며 삯을 받아 연명하는 그런 문화예술교육은 우리가 키운 민주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독선과 아집에 항거하며 맷집을 키웠고, 주먹다짐과 격렬한 몸싸움도 불사하는 투사의 정신을 가졌으나 철학과 영혼은 광화문 근처나 여의도의 후미진 광장 귀퉁이 술집에 팔아먹었으니까. 둘은 ‘문화민주주의’로 이론화 되는 듯 했으나 철학이나 영혼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그저 어딘가에 꽂아 둔 민주주의의 낡은 깃발 하나면 족했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은 낡은 패러다임의 수렁에 빠졌다. 하루속히 기대효과를 내야 하니 ‘속도주의’를 따르고, “너도 하면 나도 한다.”식 ‘평등주의’로 프로그램 질을 떨어뜨리며, “내꺼” “니꺼” 따지지 않는 ‘형식주의’는 프로그램 도둑질을 우습게 알고, 사업성과를 최대한으로 부풀리기 위해 ‘최대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그 자신을 제외한 사회전반을 냉소하는 ‘냉소주의’에 물들어 있으니.


문화예술교육은 내부 혁명이 필요하다. 그동안 대안교육, 미래교육의 본질이 썩어갈 때, 양적으로 팽창한 별별 문화예술교육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이면으론 친(親)상업주의에 물든 진보지식인 사회의 얼굴을 반영한다. 그 모든 진보적 교육의 대안과 정책을 생산해낸 장본인들이 그들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문화예술교육의 이름으로 대안교육도 잡아먹고 미래교육도 잡아먹는 괴물이 된 듯하다. 때때로 그들은 문화예술교육이 마치 교육의 만병통치약인양 선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기성’ 사업을 펼치기도 한다. 철학은커녕 교육방법론 하나 변변치 못한 프로그램으로 말이다. 이런 고질적 병폐를 변혁하지 않으면 문화예술교육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할 것이다.

내부 혁명을 위해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는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이다. 둘째는 문화예술교육 철학입론을 위한 지적 사유의 전개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문화예술 유산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런 문화예술을 창출케 한 경전과 성인들의 기록은 헤아릴 수 없다. 문화예술교육이 대안이 아니라 인간학의 본질일 수 있음은 바로 그런 위대한 유산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론이 필요할까?

 


두 가지 방법론의 예시


문화예술교육 방법론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이론을 생각해 본다. 두 이론은 예술작품 분석에 사용되고 있는 분석 방법론이다. 문화예술교육이 궁극적으로 전인적 인간학을 목표로 할 때, 이 두 이론은 충분히 검토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흥미롭게도 두 이론은 대상이 된 예술작품만의 해석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예술적 문맥, 즉 총체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작품과 연계된 역사, 철학, 문학(사), 예술(사) 등 인문학의 숲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론이 앞서 언급했던, 말 그대로 ‘콘텍스트(context:문맥)’ 이론이다. 이 이론의 방법론은 주로 문화적 배경에 의존한다. 독일 학자 바우어(H. Bauer)가 이 방법론을 성장시켰는데, 기존의 양식이론과 도상해석학에 의한 의미 분석이 오직 예술작품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입했다. 대체로 예술작품은 그것들 간의 비교분석을 통해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양식과 도상해석을 위한 비교대상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근접지역이나 동일 문명권에서 찾기 힘든 경우 바우어가 취한 방법은 문화적 배경을 역사인문학적 측면으로 넓혀 더 다양하게 제시해 보는 것이었다. 그럼, 뜻밖에도 아주 멀리 떨어진 문명권과 연결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들 문명과의 교섭관계를 확인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독일의 미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 제시했던 ‘층구조’(層構造, Schichtungsstruktur)이론이다. 그 이론의 해석구조는 이렇다. 여기 미술작품이 하나가 있다 하자. 작품은 전경(Vordergrund)과 후경(Hintergrund)이 있다. 전자가 감성의 단순한 요소, 즉 형태와 색채에 관련하는 반면, 후자는 보다 깊고, 보다 심오한 요소에 집중한다. 후자는 다시 네 개의 층으로 나뉘는데, 첫째, 3차원적인 것, 둘째, 생명력, 셋째, 심리적인 것, 넷째, 정신적인 것 등이다. 이에 대한 하르트만 본인의 설명.

 

“후경은 깊이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초상화의 전경 배후에서 나타나는 것을 더 가까이 관찰한다고 하면, 우선 첫 번째 층에서는 그려진 인물의 순순히 외적인 측면, 즉 물적인 것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서 단순한 전경의 이차원성에 대립된 삼차원이 나타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생동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생동감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다시금 심리적인 존재,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생명체에서 얼굴표정, 전체적 형상, 거동, 태도 등에 의해 만나게 되는 내면적인 것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서 얼굴표정 속에 감춰진, 예컨대 렘브란트가 그의 초상화에서 깊이 있게 표현해낼 줄 알았던 인간의 운명 같은 것이 드러난다. 그림에서 관념적 측면으로 나오는 이 운명성 역시 가장 최후의 층은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우리들 모두에게 적합한 보편적 인간성이 두드러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후경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의 정신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작품에 이입된 작가의 창의적인 정신일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도출된 그런 미의 목적과 정신의 재인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살아있는 정신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을 겪게 되며, 마침내는 작품의 해석에 이르게 될 것이다.(권영필,『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253~256쪽 참조)


두 이론이 문화예술교육 방법론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들 이론에 다양한 문화예술, 즉 탈춤이나 판소리, 우리 옷이나 가구, 심지어 한옥과 같은 건축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이론이 예술작품의 의미만이 아니라 작가의 창작의도, 문화적 상관성, 그리고 인류의 정신까지도 파악하려는 매우 심도 깊은 방법론이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화예술교육이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처럼 교양 또는 기능교육과 상관없이 인문정신의 성숙을 위한 매개교육이란 점과도 밀접하게 상관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을 적용할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사실, 한국 사회 문화예술교육의 기형적인 확장과 비현실성은 철학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적 부재가 우리 시대의 문화적 경향성, 즉 ‘아비투스(습속)’의 전형인지는 모르겠으나(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일 것이지만), 문화예술교육의 작동원리를 위한 ‘마이크로코즘(microcosm:소우주)’의 교육철학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철학을 위해 몇 가지 전제를 생각해 보았다.

 

철학을 위한 다섯 가지 전제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 가에 대한 생각이 먼저 전제되어야만 위대한 스승과 만날 수 있을 터. 나는 여기서 다섯 개의 키워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①신화 : 참나(眞我)의 신령한 뿌리 ②영성 : 참나의 푸른 수액 ③역사 : 참나의 오래된 옹이 ④지혜 : 참나의 흰 그늘 ⑤공감 : 참나의 이웃 둥지 등인데, 이 다섯 가지는 서로 나뉘는 것이 아니며, 마치 한 그루의 큰 나무처럼 하나면서 전체다.

 

① 신화 : 참나(眞我)의 신령한 뿌리


신화는 우리가 상실한 원문명의 가장 웅숭깊은 철학이요, 역사요, 사상이다. 신화는 “세계의 발생, 신들의 계통, 세계의 구조, 인간의 발생, 세계의 종말” 등을 주제로 하며, 사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시적(詩的)인 이야기에 의해서 형상화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성한 서술(敍述)’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에 관한 신성한 전승 설화, 즉 여러 현실적 존재인 우주, 인간, 동식물, 특정의 인간행위, 자연현상, 제도 등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들려준다.


신화는 ‘참나’의 신령한 뿌리다.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와 예술을 통한 ‘참나’의 재인식과 그런 성찰에 있다. 그리고 그 성찰적 사유의 심오한 후경에 신화가 존재한다. 신화의 뿌리는 곧 참나의 뿌리이니 반드시 우리는 신화와 신화소의 맥점을 찾아야 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제주도에는 1만 8천여의 신이 있고, 그 중 ‘세경본풀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자청비로 그녀는 대지의 신이고 곡식의 신이다. 또한 생산, 양육의 여신이기도 하다. 일생을 제주신화 연구에 바쳤던 진성기 선생은 “신화는 인습에서 성장한 여러 신들의 근본 내력인 동시에 그것은 그대로 제주선주민의 시초를 설명해 주는”것이라 설명한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는 우리가 파악하기 힘들만큼 많은 신화가 잠자고 있다.


단군은 그동안 신화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요하문명의 발굴로 신화에서 역사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황하문명보다 1천년이나 앞 선 문명으로 연구되고 있다.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옛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다. 바로 이곳이 요하문명의 발굴지인데, 이제 우리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다시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응결하는 다양한 인문지리학적 상상력을 키워야할 것이다.

 

② 영성 : 참나의 푸른 수액


문화예술교육의 형식주의가 낳은 가장 큰 폐단은 영성은커녕 인성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단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사람다움’의 실현을 위해 기획된다. 그 ‘다움’은 잘 성장한 나무들의 품격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문화예술교육은 영성의 ‘씨알트기’를 통한 인성의 완성에 그 핵심과제를 두어야 한다. 학교교육 또는 사회교육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가 준비한 최소한의 사회적 윤리라면, 문화예술교육은 학교와 사회가 결코 성취하지 못한 인문학적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기획하는 자발적 윤리에 가깝다.


영성은 내 안에 잠자는 ‘참나’의 본질이다. 그것은 어두운 페르소나(Persona:가면을 쓴 인격)일 때도 있으나 아브락사스(abraxas)의 실체이기도 하다. 아브락사스는 참과 거짓, 선과 악 그리고 빛과 어둠 등 모든 양극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신성이다. 영성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이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영성의 ‘깨움’은 붉은 피를 푸른 피로 바꾸는 작업이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듯 육체를 영적 신체로 ‘탈아(脫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영성이 충만한 인간이 가장 사람답다.


③ 역사 : 참나의 오래된 옹이


나의 역사는 고사하고 아버지의 역사, 어머니의 역사,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증조부 증조모 고조부 고조모에 이르면 우리는 거의 공백상태다. 내 역사의 가장 큰 옹이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그런 잃어버린 ‘나’의 역사를 체현하고 기억하기 위해 기획될 필요가 있다. 나는 다시 너의 역사로, 우리의 역사로 넓어진다.


우리는 여러 문명의 역사, 국가의 역사는 기억하지만 지역의 역사, 가족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라는 주체에 대한 인식 없이 대타자에 대한 정체성만을 부르짖는 형국이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한 ‘인정 투쟁’에 나서야 한다. 즉 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를 둘러싼 세계의 역사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와 가족, 나와 지역사회, 나와 조국, 나와 문명, 나와 세계, 나와 우주로의 끝없는 확장선은 끊임없이 ‘나’를 묻는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언젠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탐사했던 권영필은 실크로드와 한반도의 역사적 연관성을 떠 올리며 이런 말을 남긴바 있다 ; “그 옛날 사마르칸트까지 갔던 고구려인의 투지와 웅지를 상기하면, 우리는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시야가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역사를 통해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존재의 자기 확인이 가능해진다.”

‘나’의 확장선이 가 닿을 수 있는 세계는 무궁하다. 그러나 역사적 인식 없는 확장선은 종착지 없이 굴러가는 열차와 하등 다를 바 없다.

 

④ 지혜 : 참나의 흰 그늘


지혜는 울음과 웃음을 구분하지 않는다. 슬픔과 기쁨도 구분하지 않는다. 지혜는 지식의 충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구분하지 않는 명석함에서 온다. 우리는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다. 무엇이 슬프고 기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슬픔이 한이 없다가도 기쁨이 오면 금방 웃는다. 완전한 빛도 완전한 어둠도 없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강하다. 우리는 그 어둠에서 흰 그늘을 엿본다. 지혜는 그런 것이다. 참나의 내부에는 그런 감정의 빛 그늘이 가득하다. 그것들이 온전할 때 몸은 지혜로워진다. 그것들이 몸 안에서 ‘신명(神明)’을 이룰 때 지혜가 충만해진다. 시인 김지하는 신명을 ‘활동하는 무’라 했고, ‘율려(律呂)’라 했다 ; ‘율(律)’이란 운율 곧 질서, 코스모스를 말하며 생명의 펼쳐지는 힘을 말한다. ‘려(呂)’란 혼돈, 카오스를 의미한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2박이 ‘율’이며, 3박이 ‘려’이다. ‘흰 그늘’이라는 개념을 여기에 맞추어 보면, ‘흰’ 곧 밝음은 질서, ‘율’에 해당되고, ‘그늘’ 곧 어둠은 혼돈, ‘려’에 해당된다.
(이병창, 동아대 교수)


만약 우리 몸의 내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때 지혜는 독선이 된다. 그래서 지혜는 시인의 시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문화예술교육은 시를 법문으로 하여야만 한다. 문화예술교육의 시작과 끝에 늘 시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⑤ 공감 : 참나의 이웃 둥지


신화, 영성, 역사, 지혜가 있어도 공감하지 못하면 헛것이다. 다섯 개 철학적 키워드의 융합이 아니라 신화의 공감, 영성의 공감, 역사의 공감, 지혜의 공감처럼 각 개별적 키워드에 공감이 결합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크게 모여 공감의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마치 큰 나무가 바람, 구름, 새, 곤충, 짐승들과 같은 온갖 자연의 생명을 그 안에 품듯이 문화예술교육도 그와 같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최근 펴낸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은 ‘호모 엠파티쿠스’라고 말했다.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공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이를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며, 수동적인 입장과 달리 적극적인 참여로 나타난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사회구조는 2백년 가까이 변함없는 키워드였던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며, 그것은 사람들 간의 ‘공감’에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공감은 문화예술교육 철학의 큰 울타리이다.

 


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에 의하면, ‘상상의 공동체’는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이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실재로서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경험되는 시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인류학적 명제를 깔고 있다. 우리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상상의 공동체’를 근대적 국가주의로부터 우주적 지구주의로 확장하는 꿈을 꿀 수 있다. 이를 위해선 필연적으로 우리 밖의 ‘상상의 공동체’와 만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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