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전 리뷰

2010.09.28 16:31 from 분류없음



자연예술가와 화가 : 임동식 개인전_ 월간미술 2010 10월호 리뷰

9.3~11.3 스페이스 공명

 

현대 자연미술의 미학은 한국 자연미술가 그룹인 ‘야투YATOO’에 의해 제창되고 수행되었는데, ‘야투’의 의미는 ‘들(野)=자연’에서 메시지를 ‘던진다(投)=표현’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들’은 기존 미술 영역의 외부 즉 미개척의 광야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순수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임동식이 작성한 1981년 야투 창립전 서문에는 일종의 창작을 위한 행동강령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하라. 둘째, 자연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력을 예찬하라. 셋째, 사계절연구회를 가져라. 넷째, 작품집을 발간하여 의식의 영역을 넓혀라. 다섯째, 새로운 방법론을 개진하라. 여섯째, 들에 핀 야생초와 같은 생명력을 지녀라. 일곱 번째, 연구하여 좋은 작품을 발표하라.




1980년 이후 30년 동안 지속해 온 임동식의 자연미술은 그 스스로 제정한 강령을 인간의 방식으로 진화시키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연에 더 근접함으로써 ‘자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독일에서 귀국한 뒤, 1990년대에는 원골이란 마을에 띳집(草廬)을 짓고 홀로 살면서 ‘신선한 접촉’을 일상화 했고, 2000년대에는 그 접촉의 기억을 재현하는 회화와 풍경화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재현이 삶의 성찰이라면 풍경화는 자연의 재현이면서 시간의 성찰이라 할 만하다. 그의 풍경화는 대상이 되는 장소에서 오랜 시간동안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을 인상파에 빗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빛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거나 빛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인상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전체를 본다. 큰 나무가 대상이라면 나무의 풍경을 이루는 빛과 바람, 흙, 잎과 가지, 향취 그리고 그것들의 결까지 풍경의 낱낱을 새겨 넣는다.




수개월에서 수 년 동안 한 작품 한 작품씩 시간의 결이 쌓이고 채워진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봄의 푸릇함이 솟고 여름의 작열이 더해지며 가을과 겨울의 성숙과 쉼이 구분된다. 그의 붓이 농기구라면 물감은 씨알이고 그의 행위는 노동이다. 실제로 그의 풍경화는 대부분 농부인 벗이 추천한 풍경들이며, 그 농부의 차를 타고 들에 나갔다가 함께 돌아온다. 그들은 다르나 같은 농삿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원골에 살면서 “藝卽農 農卽藝”의 미학을 선언하기도 했다. 예술과 농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




선행 미술에 대한 극복을 통해 미술이 진화해 왔다면, 자연미술은 극복이 아니라 소급일 수 있다. 더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원초적으로 소급해야만 자연미술은 가장 투명한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석도(石濤)는 자신의 화론 들머리에서 태고엔 법이 없었는데 그것은 흩어지지 않은 통나무 같다고 했다. 그런데 통나무가 흩어지자 법이 생겨났다고 했다. 그 흩어짐이 한 번 그음이라는 일획이다. 즉 나무가 흩어지자 일획이라는 법이 생겨난 것이다. 가장 숭고한 일획은 그 자리에 죽어 흙이 되고 자양이 되어 새 싹으로 부활하는 것일 테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의 완전한 흩어짐. 임동식의 자연미술은 석도의 일획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일획은 숭고하며 근원을 향해 있고 완전한 흩어짐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흩어짐은 그 자신이며 견고한 미학이고 우리의 관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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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권력과 욕망의 허상을 말하다

- 박용철 조각의 의미와 ‘frame’에 대해 

 

박용철의 청동 갑주들은 구체적 실체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 같으나 사실은 관념이 만들어 낸 알 수 없는, 어떤 동체의 껍질만 남은 허상들이다. 그는 고대 검투사나 권력자의 형상을 발굴, 복원하듯 잘게 썬 동판 조각을 용접하어 갑주의 부분들을 완성하고 연결하였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매우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갑주들처럼(그것은 최고의 보존처리요원들에 의해 수년 동안 복원과정을 거쳐야 전시되기에),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소멸해 갔을 갑주의 상태를 상상하며 손톱만한 크기의 동판조각을 하나씩 이어 붙여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들의 형상이 완성되면 다시 그 위에 투명 폴리코트를 발라 거칠게 코팅을 한 다음 거의 투명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갈아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갑주들은 하나의 작품이 되어 마치 먼 과거에서 넘어 온 듯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하나 둘 서게 된 것.


그의 조각으로서의 갑주들이 보여주는 갑주 본래의 원형상은 2천 5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어느 한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장시간동안 인간이 전투적 행위를 하기 위해 혹은 힘의 징표를 보여주기 위해 입었던 도구였다. 여기선 2천 5백 년 전을 상정해 분석해 보기로 하자. 박용철 작가가 제작한 갑주의 형태는 서구적인 것, 특히 지중해 근방의 고대 그리스와 연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대략 제2차 페르시아전쟁이 한창이던 때와 맞물릴 것이다. 정확히 기원전 490년인데, 그 때는 그리스의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의 침입에 맞서 마라톤 전투에서 대승했던 해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약 40킬로미터를 달려 승전보를 전했던 바로 그 전쟁과 그 해.


그런데 박용철의 갑주와 그리스시기의 갑주가 실제로도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갑주나 투구의 형상이 유사하긴 하나 그 시대의 갑주를 고증한 것이 아니며, 구체적으로 어떤 누구의 갑주를 모방한 것도 아니니까. 다만, 우리는 갑주보다도 머리에 썼던 투구가 너무 닮아있기 때문에 쉽게 그것의 시대인식을 헷갈려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갑주와 고대 페르시아나 그리스시기의 갑주가 분명히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그 의문.


나는 제3차 그리스 원정까지 나서야 했던 페르시아의 저돌적이고 멈출 줄 모르는 전쟁의 욕망을 생각해 본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제1차 원정에서 페르시아 함대는 아토스 곶에서 난파당해 전함 300척과 군사 2만을 잃었다. 제2차 원정에서도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공격했으나 6,400여명을 잃고 귀국했다. 전쟁에 패한 뒤,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면전인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으나 그는 결국 사망했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르가 뒤를 이어 그리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도 그리스 원정을 성공할 수 없었다. 약 45년에 걸쳐 지속된 이 전쟁은 역설적으로 페르시아에 적극적으로 맞서 승리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그리스의 중산층과 가난한 민중들의 정치적 발언이 강화됨으로써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박용철의 갑주가 역사성을 담보하는 구체적인 증거로서의 갑주는 아니더라도 전쟁의 욕망 혹은 권력의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두 국가 간의 치열했던 전쟁의 역사는 그런 상상의 현실인식과 상징을 위한 부수적 자료에 불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권력의 실체 또는 욕망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갑주 조각의 세 가지 형상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갑주와 투구가 드러난 것만을 묶어서 해석할 수 있는 <공허한 갑주>, <갑주, 검-0921>, <사라진 정원>인데, 통합적으로는 갑주와 투구의 복원(?)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갑주, 검-0921>에서 가장 많은 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핵심은 그 갑주가 인간의 육체를 본 뜻 것으로 마치 근육질의 단단한 고대병사의 갑옷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갑옷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도 아닌 빈껍데기와 같은 ‘공허한 갑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마치 이것이 진짜 갑옷인양 참으로 리얼하게 유물이나 유품처럼 설치해 놓았다는 점. 아마도 그런 전시연출로서의 시각적 트릭이 어떤 긴박감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섬세한 조형인식과 ‘권력’, ‘욕망’따위를 드러내려는 작가적 치열함이 조화롭게 드러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고 그래서 압도적이며 두렵기까지 한 동판 갑주와 투구, 큰 칼은 우리 앞에 있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어떠한 본질도, 존재도 상실한 단지 하나의 쇠일 뿐이다. 한마디로 공허한 갑주란 권력의 공허, 욕망의 공허를 상징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안락의자>이다. 대체로 의자는 인간의 부재로서의 ‘실존’과 더불어 풀이되는 경우가 많으나 이 의자는 첫째에서 살펴보았던 갑주와 같이 권력자와 상응하여 어떤 ‘권좌’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의자는 그 자체로 권력의 또 다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용철의 ‘안락의자’는 그 스스로 독립된 하나의 형상으로 완고하며 고집스럽고, 뿐만 아니라 육중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안락의자’가 지상으로부터 가볍게 떠올라 불안한 기울기를 엿보이는 것은 ‘안락함’의 그 자리가 실제로는 어딘가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공에 떠 있는 저 빈 권좌야 말로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조각적 장치가 아닐까.


셋째는 <찰나(刹那)>를 표현한 작품. <찰나(刹那)>는 투명인간이 큰 천을 뒤집어 쓴 채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돌아서다가 일순간 정지한, 굳어 버린 형상이라고 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선과 악을 다룬 무수히 많은 SF영화에서 이런 유의 형상을 많이 보아왔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에서 을씨년스럽게 등장하는 악의 제왕들처럼. 그러나 박용철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런 악의 형상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떤 형상이라기보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찰나’ 즉 순간으로서의 아주 짧은 시간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권력이나 욕망 따위는 다만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 또한 권력이나 욕망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 마치 우리 눈에는 제왕처럼 보이고 두려운 무엇으로 보이기도 하고, 가려져 있기까지 하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虛’일뿐이라는 것.




이렇게 살펴보면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언인지 확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두 대통령의 죽음에 굴하지 않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과 맞물린다. 우리는 과거 군부독재 정권을 ‘제왕적 권력’이라 불렀으나 민주적 절차로 등장한 현 정권도 그에 못지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한 것이다. 그들은 권좌에 있을 때 권력의 막강함에 도취되지만 결국 사라질 것이다. 거대한 바위가 모래알이 되듯 그 힘도 한순간에 흩어질 것이다. 아테네의 시민들처럼 우리도 제왕적 권력과 맞선 민중들에 의해 민주주의를 꽃피우지 않았던가! 박용철은 그렇게 흩어졌던 권력의 허상, 욕망의 허상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비평적 추신① : ‘찰나’에 대하여

서두에서 그의 작품들이 손톱만한 크기의 동판 조각들로 제작되었음을 밝힌바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갑주나 투구, 의자, 그리고 ‘虛의 실상’이라 표현한 형상들이 시각적으로 강렬하여 그 재료적 질료를 놓치기 쉽다. 사실, 위에서 그런 형상을 묘사하고 해석한 것보다 실제로는 그가 집요하게 붙여나간 동판 조각들에 많은 의미가 숨어있다. 갑주든 투구든, 의자든 혹은 <찰나(刹那)>든 그의 작품들은 모두 수천, 수만 개의 동판 조각들의 집합체이다. 돌이나 브론즈, 폴리코드 그 외 여타의 재료를 마다하고 굳이 그런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밀은 <찰나(刹那)>에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들 중 가장 마지막에 제작한 작품이다. 권력과 권좌의 형상으로서 갑주나 투구, 의자의 의미는 비평적 관점에서 그리스를 빗대어 풀든 혹은 다른 무엇을 비교하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과 욕망의 상징이 아닌 다른 차원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이다. <찰나(刹那)>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풀어 놓은 <찰나(刹那)>의 묘사와 해석은 너무나 일반적인 해석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그 함정에 빠져 그가 심어놓은 숨은 의도를 간과하게 된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각자 그 형상의 시각적 실체에 집중하더라도 작가의 의도를 한 번쯤 깊게 사유해 보기를 바란다.


‘찰나(刹那)’는 불교적 개념이며, 그것은 시간의 최소단위로서 ‘순간’을 뜻한다. 수학적으로 계산했을 때 1찰나는 약 0.013초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나 순간의 의미보다도 그것의 불교적 풀이 즉, 세상의 모든 것은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나아간다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의 의미가 박용철의 조형적 사유와 맞물린다. 그의 수천, 수만의 동판 조각들은 바로 찰나의 현실적 오브제인 것이다. 그 수없이 많은 조각들이 응집하여 만들어 낸 조형적 결과물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 <찰나(刹那)>는 그런 작가적 인식이 만들어 낸 일종의 트릭같은 것일지 모른다. 투명인간이니 악의 제왕들이니 하는 매우 단편적인 묘사는 그래서 매우 위험한 해석이면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작가적 현실을 고민하며 방어적인 포즈로서의 형상을 상상한 것이라 하니 참으로 민망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열려있는 것이다. 비평가든 관람객이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의지대로 해석할 수밖에. 자, 그러니 작품을 어떻게 보든 그의 찰나로서의 동판 조각을 기억하자. 그 낱낱의 조각들이 흩어져 갑주가 되고 투구가 되고 의자가 되었으나 그 이후의 형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비평적 추신② : 박용철은 이번 전시의 제목을 ‘프레임(frame)’이라 했다. 프레임의 뜻은 뼈대나 틀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갑주와 투구를 빗대어 뼈대와 틀의 개념으로 프레임을 제목으로 쓴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정치적 의미로서 ‘frame up’을 생각해 본다. 그 의미는 “정치적 반대자 등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 탄압하고 공격할 목적으로 사건 따위를 날조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그리 유사한 개념은 아니지만 ‘시스템(system)’을 생각해 본다. 프레임의 경우처럼 시스템이란 말도 다양한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예컨대 혁명이란 부패한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권력과 욕망의 카르텔(cartel)이라는 프레임, 그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이 곧 혁명인 것이다. 어쩌면 박용철의 프레임은 그렇게 해체된 시스템의 부분들일 수 있고 또는 속절없는 허상의 실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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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가 없어 쌓아 올릴 수 없는 것도

그 크기는 천리에 이른다!

- 서정학의 ‘개념적 평면’으로서의 ‘결’과 그 의미

 

 

서정학의 작품은 회화가 멈춘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초기 회화는 그가 살았던 남해 풍경이었으나 지금 그의 작품은 붓도 물감도 풍경도 없이 오롯이 종이의 결만 남았다. 그는 자신의 회화가 더 이상 탈주할 수 없는 곳에서 붓을 던졌다. 그 대신 한지를 선택했다. 파지나 휴지가 된 한지를 모아 곱게 편 뒤 둥글게 말아서 오리고 잘라낸 종이뭉치 토막들은 다시 그의 붓이 되고 물감이 되었다. 종이뭉치는 빈틈없이 접어 풀을 바른 것이라 단단하기가 마른 나무에 버금가는데, 그의 치밀하고 집요한 정신이 가장 먼저 느껴지는 부분이다. 토막으로 잘라 낸 것은 다시 세로로 반원을 잘라 쓰기도 하지만 비스듬히 사선으로 잘라 쓰기도 한다. 우리는 그 종이가 본래 서예나 문인화에 쓰였던 것임을 찾아볼 수도 있다. 먹의 농담과 채색의 흔적들을 잘린 단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

 

개념적 평면의 구축 ; 구체적 현실의 직조


수없이 쓰고 그려졌던 종이들은 그것이 미완이든 초벌이든 혹은 실패작이든 상관없이 하나의 서화(書畵) 즉 작품이었다는 것인데, 그는 작품이 되지 못한 그것들을 마치 본래의 원형질인 나무로 재생시키듯 둥근 종이뭉치로 말아서 사용한다. 나무가 흩어져 종이가 되고, 종이가 모아져 나무가 되는 이 순환의 고리는 서정학의 작품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초일 것이다. 나무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나무로 오는 과정은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나무는, 특히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는 껍질을 주로 쓰는데, 물에 삶아서 표백하고 잘게 부수어 한 장씩 떠내 말린다. 그 종이에 누군가의 글과 그림이 더해진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작품이 된 것은 극히 일부일 터. 서정학이 이곳저곳에서 수거한 버려진 작품들은 그렇게 미학이 되지 못한 오류와 착오의 실체들이다. 그는 오류와 착오의 개념을 잘게 부순 뒤 뭉치토막이라는 새로운 오브제로 전환하여 미학화 함으로써 이질적이나 결코 낯설지 않은 ‘개념적 평면’을 완성했다.


그의 ‘개념적 평면’은 누군가의 글과 그림이었던 작품(실재. 구체적 진실)이 종이뭉치가 된 뒤 절단되어 뭉치토막이라는 오브제(개념)가 된 것에서 정의될 수 있다. 본래의 한 성질이 무수한 재료가 되어 추상에 가까운 오브제로 전환됨으로써 본래의 성질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오브제인 개념과 그것들이 이어 붙어 형성된 평면이미지만 남게 되었다는 것. 그가 회화를 그만 두게 된 것도 이와 같은 개념적 전이현상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시각적 사실로서, 색채의 구체적 인식을 화면에 투영할 수 있는 풍경화를 오랫동안 그려왔으나 그의 작품은 결코 새로운 예술의 비등점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결국 그는 종이뭉치(오브제)를 선택함으로써 비등점에 오르지 못한 풍경화(혹은 회화)의 실재성을 낱낱이 쪼개 흩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 흩어진 종이를 다시 화면에 개념적으로 재구축하여, 풍경화가 성취하지 못한 구체적인 현실을 드디어 성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역설일 수 있다. 그러니까 구체적 현실로서의 풍경은 객관적인 진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객관적 진리(구체적 현실로서의 풍경화)를 해체하여 주관화함으로서 미학적 진리란 오직 작가적 주관성(개념적 평면-개념으로서의 풍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관적 진리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란 얘기. 그러므로 그의 개념적 평면은 풍경화보다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확장형 구조 ; 하나의 결에서 무한으로


그는 뭉치토막들을 평면에 집합적 형식으로 부착함으로써 다양한 구조의 평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붙여 내려온 세로형 결, 지층을 올리듯 쌓은 가로형 결, 둥근 단면이 드러난 밀집형 결, 둥근 원의 방사형 결, 두 개의 지각이 충돌한 맞배형 결, 단층형 결, 휘몰이 결, 그 외에도 수없이 다양한 구조의 결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그 결이 어떻게 형성되고 배치되는가에 따라 <함성>이 되고 <소리의 흔적>이 되며, <바람>이 되고 <달>이 된다. 크게 보았을 때, 그 결들은 바람의 결이고 대지의 결이며, 물의 결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윤회>나 음과 양, 공간, 무심(無心)과 같은 다소 철학적 개념조차도 결의 형식으로 형상화하여 그 진폭을 넓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결들은 작품명이 하나의 명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결의 집합과정에서 또는 집합 후 그의 심상에 떠 올랐던 이미지의 풍경을 작품명으로 명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작품들은 뭉치토막이 형성하는 결이 무한으로 확장될 수 있는 ‘확장형 구조’를 취하는 특징이 있다. 만약 캔버스 화면이라는 평면구조의 제한이 없다면, 그의 작품은 크기와 무관하게 하나의 결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소리의 흔적>을 예로 들자. 일정한 크기의 토막을 가로형 결로 이어 붙여 쌓은 이 작품은 그 밖을 상상하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 결의 상상은 캔버스 크기의 제한점을 쉽게 월경해 버리는 것이다. 캔버스 크기가 ‘소리의 흔적’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다만 어느 한 순간의 크기, 즉 캔버스 크기에 멈춰 있을 따름이다. 멀리서 보면, 소리의 흔적은 다만 하나의 결로 보인다. 더 멀리서 보면, 작은 선과 회색빛이 만들어 낸 평면일 뿐이고. 지극히 작은 두께의 결을 쌓아 올렸으나 상상에 따라 그 크기는 천리가 될 수도 있고, 우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작품은 보여준다. <달>이란 작품도 다르지 않다. 그의 달은 무수히 많은 결들이 응집한 결의 집합이다. 그 결의 크기를 판의 크기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적 인식일 따름이다. 달은 우주의 결과 더불어 형성되었고, 그의 작품도 그렇게 확장형 결로 완성되었다.


『莊子』「천하」편에서 혜시(惠施)는 “지극히 커서 더 이상 그 밖이 없는 것을 大一이라 한다. 지극히 작아서 더 이상 그 안이 없는 것을 小一이라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고 했고, “두께가 없어 쌓아 올릴 수 없는 것도 그 크기는 천리에 이른다(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고 하지 않았던가. 大一의 입장에서 “하늘과 땅의 높이는 같고, 산과 못도 평탄하다(天與地卑 山與澤平).”는 이치를 서정학의 작품을 통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정학의 작품들은 모두 엇비슷한 높이의 평면구조와 마티에르를 가졌다. 그러나 소리가 되고 바람이 되며, 달과 숲이 되는 이치는 모두 다르면서 같다. <소리의 흔적>과 <달>은 다른 심상의 이미지를 구조화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료와 배열은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흐르며 유사한 구조로 이어진다. 大一의 입장에서 그의 ‘소리의 흔적’과 ‘달’의 높이는 같고 ‘산’과 ‘숲’도 평탄하다. 아니, 더 나아가 그의 모든 작품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지 않겠는가! 혜시가 말했다. “해가 하늘 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서쪽이나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서정학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그의 한 작품이 아니라 그것들의 전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근원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울어짐이야말로 결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중묘지문衆妙之門 ; 모든 것이 나오는 문


우리는 이쯤에서 그의 작품이 어떤 구체적인 현시로서 풍경이나 단일형상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풍경이나 형상의 근원으로서의 자연, 그 자연의 결을 표현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결을 표현하는 미학적 방법론이 동양의 고대 자연사상이나 논리학과도 만날 수 있음을 발견한다. 물론 그가 그 스스로 철학적 분석이나 분석에 기반한 창작 방법론을 선취해 놓고 창작에 임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작품들이 어떤 논리적 기초를 두고 정반합을 이루며 개념적 평면을 형성시킨 것도 아니다.


그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태도로 절합과 접합을 반복하며, 자동기술적인 태도로 토막들을 이어 붙였다. 무의식과 자동기술적 방법은 논리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무의식과 자동기술적인 태도로서의 그의 행위와 개념적 평면으로서의 논리적 구조라는, 결과로서의 작품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 자연사상은 논리와 합법칙성으로 분석하기 어려운 명제들을 제시해 왔고, 그래서 그 해석의 다양성 또한 늘 열려 있었다. 노자가 “사람은 자연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는데, 그런 순환적 알레고리야 말로 자연사상의 핵심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논리적 명제를 제시했던 혜시를 빗대어 읽은 서정학의 작품들은 논리적 틀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는 논리, 즉 탈논리적 입장에서 분석되어야 더 풍부해 질 수 있다는 판단이 서게 된다. 그렇다고 혜시의 명제가 서정학의 작품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사실 혜시의 명제논리는 전통적인 서구의 논리 개념으로 보면 황당무계할 뿐이다. 그런데, 그 황당무계한 개념이 동양의 자연사상이고, 한마디로 ‘도(道)’라면?


노자는 『도덕경』 첫 장에서 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일 필요는 없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사물의 이름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 이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는 그것이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으나 이름을 붙이면 시작 전의 그 무엇을 천지만물의 어머니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름이 없을 때는 그 시작의 묘함을 보려고 하지만,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이 드러내는 것만 보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둘은 같은 것이며 다른 것은 이름뿐이다.


우리는 노자의 글을 빗대어 서정학의 작품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작품들에 명명한 함성, 소리의 흔적, 바람, 달, 축제, 글 숲, 무심, 윤회, 선들의 합창, 공간, 산, 음양, 삶의 여정 등등은 단지 어떤 이름에 불과하다. 어떤 작품 하나를 ‘함성’이라 불러도 좋겠지만 꼭 ‘함성’일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은 명명된 이름에 제한된 것들이 아니기에. 그러나 만약 작품에 이름이 없다면 작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이름이 있어야 그것의 실상을 파악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이름 짓기 전과 이름 지은 후의 작품이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서정학 작품의 핵심이 있다. 그의 결들은 다만 하나의 결일뿐이다. 그 결들은 이렇게 저렇게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붙은 이름은 다만 이름일 뿐이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결의 이름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 이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보라, 그 수없는 결들의 형상들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은 다만 자연의 결일뿐이고, 천지의 시작이다. 이름을 붙인 뒤에야 그것이 자연으로서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서정학은 모태를 드러내기 위해 그 결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으로 자꾸만 작품을 한정하려 한다. 첫 장의 마지막은 이렇다.

 

衆妙之門 :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묘를 보건 요를 보건, 내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신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라는 사실이다.

 

서정학의 작품은 아직 완고한 해석의 틀에 메이지 않을 만큼 열려있다. 혜시의 ‘역물십사歷物十事’의 명제들을 통해 그의 작품의 확장성을 논할 수도 있고, 노자가 말한 도의 개념으로 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막 봉우리를 틔운 그의 작품들에 대해 ‘이것이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유연하게 혹은 자유롭게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가 바로 현 단계 서정학의 작품세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개념적 평면’들이 발산하는 언어와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의 세계는 결국 사람과 자연, 하늘과 땅, 그리고 그것들을 한데로 아우르는 하나의 이치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주관이 보여주는 어떤 진리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혹은 상실해 버렸던 세계와 조우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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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眞如)의 세계, 그 황홀한 풍경들

- 강행복의 목판화론

 

   

초기 불교미술은 인간을 초월한 이상적인 존재로서 부처의 형상을 상징화했다. 부처가 된 싯다르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형상과 동일할 수 없었다. 진리의 부처는 그 자체로 상징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그 자리에 있다.”는 암시만으로 존재를 드러내야만 했다. 불교미술에서 초기 상징은 탄생, 깨달음(成道), 최초의 설법(初轉法輪), 열반(涅槃)의 네 가지 사건을 다룬 것인데, 모두 인물형상이 아니라 그런 존재의 암시였다. 첫 번째, 부처의 ‘탄생’은 세상의 풍요를 상징한다. 그것은 다산과 풍요의 지모신(地母神)인 약시(Lakshmi)가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위에서 코끼리들이 뿌리는 물(淨化水)을 맞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었다. 두 번째인 ‘깨달음’은 지혜의 나무 보리수로 표현되었으며, 세 번째 상징인 ‘최초의 설법’은 법(진리)의 바퀴로 새겨졌다. 그 옆에 사슴이 있는 것은 최초의 설법이 있었던 베나레스시 인근 사르나트 녹야원을 가리킨다. ‘열반’은 스투파(탑)로 응결되었다. 통치자나 성인의 무덤이었던 스투파가 이후 부처의 사리(舍利)를 모신 곳이 된 것이다. 스투파는 부처가 열반에 들어간 순간을 나타내므로 절대적 진리를 구현한 기념물이기도 했다.


초기 불교미술의 네 가지 상징은 강행복의 판화세계를 불교미학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주요 참조점이다. 그는 판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9년경부터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초지일관하며 불교를 미학적 원천으로 삼았고, 대체로 그 상징과 관련된 소재들을 집중적으로 그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불교의 교리를 구현하기 위해 그 세계를 일궈온 것이라기보다는, 불교의 종교적 세계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불국토로서의 현실과 그 이상향의 현실이 재현된 형이상학적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의 상징을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하기 위해 그것에 천착한 것으로 보인다.


20년의 전 작품을 대상으로 치밀하게 그 미학적 관점을 분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강행복의 작품 대부분이 불교미학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많은 수의 작품은 그것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렇다고 불교미학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불교미술에서의 최초의 상징을 빗대어 강행복의 작품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비움 ; 나를 찾아 떠나는 길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깐 의문에 휩싸인다. 그가 불교에 귀의한 이유에 대해. 단순히 예술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삶 전체를 던져야 했던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교를 만났다!”고.

 

삶의 과정을 뒤돌아 봤을 때, 뭔가 잘못된 삶이었어요. 원래는 시각디자인 전공이어서 디자이너를 시작했죠. 회사도 해보구요. 그러다가 광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여기서 불교를 만났죠. 불교를 만나면서 새로 시작되었어요. 불교 판화를 이 때 처음 시작했는데, 사찰을 찾기도 하고, 법문을 비롯해서 불교관련 책들을 구해 읽었죠.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그때부터 불교는 내 삶과 예술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단편적이지만, 젊은 날의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직장생활도 하고 디자인 회사도 경영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경기도 김포가 고향인 그는 떠밀리듯 전남 광주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 해가 1987년경이다. 그는 그곳 광주에서 초기 몇 년간 심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고, 삶에 대한 반성과 회한의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박영택의 표현대로 그런 마음의 습지에 밀려든 것이 바로 불교였던 것이다.


그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의 송광사를 왕래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흐트러진 정신을 끌어 모았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욕망 따위를 남김없이 비워냈다. 사업실패와 가난, 낯선 타향으로의 현실적 도피, 그리고 깊은 회한과 희망의 상실,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온전히 그것을 비워내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그가 깨달은 것은 참 나(眞我)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 나를 찾는 일은 진리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가 불교를 통해 참 나를 찾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곧 예술가인 그가 예술적 진리를 찾겠다고 마음먹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을 비우자 스스로 그에게 왔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홀연히 성 밖을 나선 싯다르타처럼 세상의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서 그가 본 세계는 과거에 얽매인 세계가 아니었다. 고립과 고독에 휩싸인 갇힌 세계가 아니라 편재된 모든 것, 곧 열린 세계였다. 그런 자연의 섭리는 부처의 법문이었고, 자연의 이치는 또한 그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큰 스승이었다.

 

생명 그리고 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주변의 일상과 자연, 삶에서 보이는 많은 것들을 내 안에 담습니다. 여행을 많이 하지만 소묘는 하지 않습니다. 담아 두었다가 마음과 머리에서 걸러지면 그리기 시작합니다. 한 번 그린 것을 다시 고치고 수정하고 그러면서 완성해 나갑니다. 제 작품의 대부분은 그렇게 내 안에서 나온 이미지들입니다.

 

그가 말한 생명의 관계는 불교의 연기(緣起)를 떠올리게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더불어 존재하며, 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생긴다는 것인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개념의 터득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왔다.


그는 1989년부터 그가 찾아 나섰던 세계의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판으로 옮겼다. 설악산 신흥사의 겨울과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의 여름과 가을풍경을 새겼고, 항아리에 핀 연꽃을 비롯해 다양한 연꽃 이미지를 길어 올렸다. 이때의 작품들은 다분히 일러스트적이고 디자인적이며, 목판의 칼 맛을 의도하고 있으나 선이 굵어 투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렴상정(處染常淨)의 상징인 연꽃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아마도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미학의 모색 ;
첨예한 현실과 예술적 고투


그가 신화랑에서 <판화2인전>을 개최하며 미술계에 첫 선을 보인 1990년을 기점으로 1996년 12월 단성갤러리에서의 <강행복 목판화전>까지를 초기 판화세계로 볼 때, 그 시기는 불교의 미학적 상징을 심화시키기 위한 모색기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93년 갤러리 서호에서의 첫 개인전과 불교방송 초대전을 계기로 묶은 『강행복판화집』(열린불교, 1993)은 그의 초기 판화세계를 판독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인데, 이 판화집과 1996년 3월의 현화랑 전시 리플릿, 1996년 12월의 단성갤러리 전시 리플릿에서 그 시기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안영길은 첫 개인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기를 평가하고 있다.

 

그는 목판과 석판, 실크스크린 등의 다양한 판화기법을 이용하여 그가 찾아낸 다양하고 친근한 불교소재들 즉 연꽃, 아미타여래, 미륵불, 반야심경, 그리고 송광사, 화엄사, 해인사를 비롯한 불교사찰 등과 자신의 깨달음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즉 구도자가 다다르고자 하는 이상향(불국토)를 산 시리즈, 여래장, 피안을 향해 구도의 길을 떠나는 모습 등을 독특한 형상화 작업과 상징화 작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불상의 도상을 굵은 선으로 단순화 한 뒤 맑은 채색 더했거나 연꽃이 있는 여러 정물을 그린 것, 그리고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과 피안으로서의 수미산을 그린 것 등이다. 또한 그 순서도 불상(주로 佛頭. 1990)에서 사찰(1990), 연꽃(1990~91), 수미산(須彌山. 1993),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1993), 여래장(如來藏. 1993), 아제 아제 바라아제(1993)로 나아가는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90년의 작품들이 1993년에 이르면 1996년까지 이어진 초기 작품들의 표현형식이 완성되고 있으며, 그가 앞으로 천착하게 될 불교적 세계관의 미의식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예컨대 <산에 사는 사람>(1992)연작, <월인천강지곡>(1992), <연화장세계>연작, <청산유수>(1993)는 모두 수미산의 다른 표현으로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데, 그 본래의 맥락에서 수미산은 큰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산과 산 사이에 큰 바다가 있으며, 해와 달이 산허리를 도는 것으로 그리고는 있으나, 그는 수미산의 의미를 그런 본 맥락이 아니라 그가 찾아 나서기로 한 ‘진리의 길’로 의미화 한다. 즉 수미산의 표현은 불교적 세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의 첨예한 현실과 예술적 고투를 상징하는 일종의 ‘실존적 표상’일 수도 있단 얘기다.


1994년과 95년, 96년의 작품들은 조금은 관념적이고 상투적일 수 있었던 1993년까지의 작품들과 달리 그 표현에서 훨씬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이다. 선을 구사하는 방식이나 대상에 대한 관찰에서 그리고 색의 활용에서도 매우 적극적이다. 또 하나는 1993년을 계기로 실크스크린에서 목판화로 형식 자체를 변환시켰다는 점도 눈에 띈다. 목판화로 바꾼 뒤, 그는 목판이 드러낼 수 있는 한계점을 농락하듯 단색판에서 다색판, 그리고 소멸 판의 느낌을 실험하고, 붓 그림을 밑판으로 한 판각과 즉흥적 표현 혹은 우연의 느낌까지 밀고가 본다. 이 3년의 시기동안 그가 이런 자율적 실험을 위해 선택한 주제는 자연이었다. 목판화의 출발이 된 <청산유수>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단색판과 단색판 이후 채색을 한 것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9445>는 붓 그림의 강렬한 필체가 살아있고, <가을바람-9696>은 다색판, <나무와 새-9696>은 다색판이되 즉흥과 우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소식-9684>은 붓 그림과 단색판, 다색판, 즉흥과 우연이 한데 어우러진 이 시기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이 다시 불교미학으로 돌아와 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 <천년의 향기를 찾아서-8125>(1998)를 탄생시킨다.


<천년의 향기…>는 목판의 판을 거의 비운, 최소한의 선으로 불교미학의 상징을 응결한 하나의 절정이다. 그는 여기서 구도의 길을 가는 수도승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수도승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걷고 있다. 그 길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대지가 끝나는 동쪽을 향해 상승하며 사라진다. 그 길이 사라진 곳에 노란 태양이 있다. 길은 거기서 멈춘 것이다. 가는 길에 네 개의 탑이 서 있고 두 개의 탑 사이에는 큰 산맥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그 산맥이 흐르는 봉우리에 몇 개의 나무들이 굳건하다. 바탕은 거대한 대지인데, 산맥의 형세로 보아 그것은 큰 물결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지 몇 개의 선일뿐이다. 비움의 미학이 만들어 낸 선(禪)의 경지! 도대체 이 시기에 그가 깨달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윤진섭은 1996년 3월, 현화랑 소속으로 서울판화미술제에 참여한 <강행복목판화전>의 서평에서 “線을 통한 禪的 세계의 표출”이란 제목으로 당시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강행복의 목판화는 선과 면의 대비를 통해 드러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선의 예술이다. 선이 주요, 면이 종을 이룬다. 흑백의 대조 속에서 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주제를 표출시키는 것은 선이다. 그 선(線)을 통해 무위자연의 선(禪)적 경지가 드러나고 있다.”고 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윤진섭의 판단은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는 그의 작품이 불교적 풍경을 보이고는 있지만 선(禪)적이라고까지 해야 할 작품이 이 시기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강행복이 그 즈음 삽화로 그렸던 ‘무위자연’이란 선시(禪詩)의 인상에서 미루어 짐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선시는 이렇다.

 

마음 안에 한 물건도 없는데,

마음 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한껏 차고 나면 저절로 기울고,

충분히 익으면 스스로 숙인다.

 

나는 바로 이 시의 체득을 통해 드디어 그가 모든 것을 비워낼 수 있는 목판의 한 경지에 이르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천년의 향기…>는 그 증거인 셈이고. 물론 이 작품까지 오기 전에 <소식-9568>(1995)과 같은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수미산 연작의 많은 작품들에서도 그런 경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의 체계가 형성한 ‘비움의 절정’은 비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비운 뒤의 선(線)과 형상의 상징이, 가득 채워서 보여주었던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더 명쾌하고 강렬하며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던 불교미술의 상징과 강행복의 작품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최초의 통로도 이 작품이 제공하고 있다. 즉 <천년의 향기……>에서 나무(<사랑의 나무>, <명상의 나무>)가 독립되어 나오고, 명상의 기하하적 형상이 돌출되며, <산과 구름-6233>(2006), <산과 해>연작(2006), <나를 찾아 걷네>연작(2007)과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럼 네 개의 상징과 강행복의 작품이 어떻게 상관하면서 의미를 형성하는가.

 




부처의 탄생 ;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첫 번째 상징인 부처의 탄생은 세상의 풍요를 뜻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다산과 풍요의 지모신 약시가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위에서 코끼리들이 뿌리는 물을 맞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연꽃이 핀 항아리도 풍요의 상징이다.

연꽃에 관한 불교의 오래된 개념은 처렴상정(處染常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래 뜻은, 더러운 곳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는 것 또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깨끗한 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연꽃을 비유하면 그 의미는 연꽃은 더럽고 추한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이 잎이나 꽃에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의 탄생은 결국 더럽고 추한 이 세상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과 같으며, 그것은 또한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는 풍요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행복의 첫 작업들 중에서 유난히 많이 발견되는 <蓮花>연작은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일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이었던 그가 예술가로서 불가에 귀의한 것이 새로운 탄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탄생이 세상의 풍요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풍요이고 그 자신의 정화이며, 그 자신의 탈바꿈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첫 연꽃 작품 <蓮花-9001>가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큰 연잎을 사이에 두고 이미 두 개의 꽃은 졌고 새로 두 송이 연꽃이 피었는데, 하나는 활짝 피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꽃망울이다. 진 꽃은 그의 과거이고, 이제 막 피어난 꽃은 그의 현재이며, 꽃망울은 그의 미래가 아닐까.

『강행복판화집』에 실린 총 12점의 연꽃 작품들은 채도와 명도가 높아 아주 밝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 작품들을 제작하던 시기에 얼마나 큰 희열과 열망을 가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연꽃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인 <蓮花-9112>(1991)는 처렴상정의 세계를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제작한 열두 점의 연꽃 작품은 이와 같이 자신의 내적 정화(淨化)에서 새로운 세계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화상과 같은 작품이리라. 그리고 1993년의 <如來藏>은 그 연꽃들과 강행복의 자아가 일여(一如)의 태(胎)가 되었음을 알의 형상으로 보여준다. 주지하듯 여래장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을 말한다. 그것은 중생의 맑은 마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실제로 여래의 태아 즉 불성(佛性)을 상징하는 것이다.

 

깨달음 ; 지혜의 나무 보리수


강행복의 판화에서 나무의 출현은 산봉우리에 있는 몇 개의 소나무가 전부였다. 1996년 모색기가 끝나갈 무렵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소나무를 비롯해 버드나무, 떡갈나무로 보이는 활엽수, 벚나무, 그리고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과실수가 전부였다. 나무가 있는 풍경에는 반드시 새들이 함께 그려졌다. 그러나 <천년의 향기……>이후 그의 작품들에는 상징으로서의 ‘나무’가 서 있다. 그 나무를 어떤 이름을 붙여 불러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천년의 향기……>와 유사한 <나를 찾아 걷네-7249>(2007)를 보면 그 나무는 탑과 더불어 서 있는 지혜의 나무다. 탑은 부처가 열반에 들어간 순간을 의미하며, 그 안에 사리를 모시고 있으니 그 옆에 선 나무가 지혜의 나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년의 향기……>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이 지극히 한국적인 느낌으로 인식하여 소나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제 상징으로 읽어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었고 그는 다시 사라수(沙羅樹) 아래서 눈을 감았다.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고 사라수 아래서 입멸에 들었던 것이다.

강행복이 가장 최근까지 탐색하고 있는 판화미학은 바로 이 상징의 나무다. 그가 ‘명상의 나무’라 부르는 이 나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나무처럼 보인다. 나무인 것은 분명하나 세계 어디에도 없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신묘하여 자연의 바람결을 따르기도 하고 형형색색의 별빛을 품기도 하며, 빛의 오로라 속에서만 그 형체를 드러내고, 거대한 대지와 우주를 잇는 신목이 되기도 한다. 그 나무는 보리수일 수도 있으며 사라수일수도 있고, 모든 나무들의 어머니일 수도 있으며 또한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씨알일수도 있다.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거대한 신단수(神檀樹)에 다름 아니다. 지혜가 샘솟고 하늘이 열리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강행복은 그런 나무에 ‘명상(冥想)’의 개념을 접목하여 그 의미를 초월적 세계의 상징으로 확장시킨다. 예컨대 명상의 호흡법 3단계를 보면 이렇다.

 

1. 다라나(dharana) :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한다.

2. 디야나(dhyana) : 마음이 고요해져 순수하고 맑아진다.

3. 사마디(samadhi) : 정신이 최고로 집중되어 자신의 의식은 사라지고 대상(對象)만이 빛을 발하는 대우주와 합치된 상태가 된다.

 

명상의 나무는 마치 각각의 단계를 묘사하듯 다라나의 나무가 있고, 디야나의 나무가 있으며, 사마디의 나무도 있다. 다라나는 <명상의 나무-1>, <명상의 나무-4>, <명상의 나무-6>, <명상의 나무-7>, <명상의 나무-9>, <명상의 나무-10>이라 할 수 있으며, 디야나는 <명상의 나무-2>, <명상의 나무-5>, <명상의 나무-8>이고, 사마디는 <명상의 나무-3>에 해당한다. 그러나 세 개의 단계를 나누어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제각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명상의 나무는 해탈이나 깨달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그린 것일 수도 있으며, 영원무궁의 세계로 통하는 문일 수도 있다. 그의 명상의 나무는 휘황한 대지 위에서 온갖 색으로 빛을 발하며 서 있다.

 



법의 바퀴와 스투파 ; 진리를 찾아서


그의 초기 작품에서 스투파 즉 탑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설법을 했던 녹야원과 법륜이 드러난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에서 눈의 띄는 특이한 현상은 명상의 나무가 자란 대지나 <나를 찾아 걷네>연작에 등장하는 드넓은 대지가 녹야원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2000년 이후 작품에서 간혹 탑의 형상을 찾아 볼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산의 형상으로 추상화 되거나(<산과 해>연작, <남산과 북산>처럼), <명상-3>의 경우처럼 산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마치 탑이 해체된 형상으로 드러난다.

법륜도 <산과 구름-6233>(2006)에서 구름의 이미지로 분석할 수 있으며, <명상-1>(2006)에서의 둥글둥글한 이미지, <명상의 나무-5>와 <명상의 나무-6>, <명상의 나무-8>의 대지에 표현된 문양들에서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지혜의 나무는 곧 진리의 토양에서 자랄 것이며, 또한 모든 진리의 근원인 자연과 그 숨결인 구름에서도 법륜의 형상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형형색색의 나무들과 산과 구름, 대지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온갖 기이한 문양들은 모두 총체적인 의미로서 ‘진리’의 풍경이 아닐까. 그러니까 곧 진여(眞如)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선(禪)은 형이상학적인 풍경이나 그런 개념과 하등 관계가 없다. 선은 바로 지금 여기의 실재만을 지시한다. 지금 여기의 물소리, 꽃향기, 바람이 곧 선이다. 지금 여기 내 존재의 실체가 선이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하고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강행복의 판화를 선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혹은 우리가 듣는 것이 진짜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강행복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래서 의미 있다. 그는 그가 보았고 느꼈던 풍경의 고갱이를 형상화함으로서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세계를 눈앞에 펼쳐 놓는다. 그것은 진리이며 또한 진여다. 최소한 그는 그 세계를 찾아 나섰고 그 길에서 본 세계를 그렸다. 우리는 바로 그 황홀한 풍경 앞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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