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 혹은 예감에 휩싸인 자연

- 헤르만 스탠들의 회화에 깃든 자연의 실체

 

두루미과의 한 새가 물끄러미 녹음에 물든 화면의 안쪽을 응시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새는 화면의 좌측 하단에 서서 우측의 여백과도 같은 넓은 초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뭇 정적인 이 작품은 헤르만 스탠들의 회화적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작품 속의 새는 화사하거나 멋진 품새로 시선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의 새는 오히려 불안과 고독과 위협에 관한 예지적 암시를 드러낸다. 어두운 흑갈색이 혼합된 새의 몰골은 마치 기름이 유출된 해안가를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반면 고개를 돌려 바라 본 화면 속의 대지는 광활한 지평과 그 내부의 생명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 초원, 사막의 신기루로 해석될 수 있는 색의 이미지는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푸른 초원도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음에 분명하다. 좌측 상단의 덧칠해진 이미지와 중앙을 가로지르는 어둡고 푸른 기운은 이곳이 끝없는 평온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한 작품을 더 살펴보자. 이번엔 푸른 늑대 세 마리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그 특유의 소리를 내 지르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이 작품은 늑대의 소리로 가득하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글거리는 빛과 한 무리의 기러기가 있고, 뒤집어 표현된 하늘 혹은 산맥이 있다. 화면의 윗부분은 '석양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와 같은 시어를 상상케 한다. 그러나 늑대 무리가 있는 땅 위에선 잔혹한 사냥이 진행되었음을 거짓 없이 보여주고 있다. 갈기갈기 찢겨진 사슴의 육체를 보라. 뿌리기와 흘리기, 칠하기와 같은 형식적 기법이 난무하는 이 작품은 자연의 순리적 먹이사슬 속에 잠재된 폭력과 강인한 생명력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그의 모든 작품들은 위에서 살펴 본 두 작품의 경우처럼 ‘예지적 암시’, ‘불길한 예감’, ‘잠재된 폭력’,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역설적 상황과 상징을 뜨거운 표현력으로 완성하고 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러한 ‘역설’의 회화적 전략은 화면 바탕과 동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화면이 ‘느낌’에 의한 몸의 율동 혹은 퍼포먼스를 중요시 한다면, 동물은 어떤 긴박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개의 형국이 맥놀이 치면서 작품들의 미학적 진폭이 뚜렷하게 타전되고 있으며, 그 진폭만큼의 두께로 ‘자연’에 관한 그의 사유가 응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그의 작품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화면 바탕 이미지와 새들의 상황 ; 위기 혹은 어떤 징조


그의 화면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실험했던 양상들을 보여준다. 뿌리고, 흘리고, 불고 하면서 우연과 필연의 이미지를 극대화 할뿐 아니라 색채의 다양한 장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J.폴록, J.뉴먼, M.로스코, C.스틸, W.드쿠닝, F.클라인 등이 그런 작업을 했었다. 특히 폴록의 푸어드(poured)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회화적 특장을 간직했었다.


헤르만 스탠들의 바탕이미지도 선배 세대가 보여주었던 작업들처럼 푸어드와 컬러필드 페인팅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스탠들의 작품을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 선상에서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를 뿐만 아니라 구상의 개념과 대치해서 출발했던 추상적 표현의 개념으로는 어떠한 해석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스탠들의 바탕이미지를 구체적인 상황으로 인식할 때, 전쟁과 파괴의 시대에 출현했던 추상표현주의의 경향이 환경파괴의 시대에 출현한 스탠들의 작품과 ‘탄생의 비밀’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그의 화면 즉 바탕이미지는 추상적이지만, 이런 추상적 심상 표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거나 이끄는 ‘상황’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상황은 명확하게 자연의 당대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바탕이미지가 타전하는 미학적이며 상징적인 언어는 어렵지 않게 인지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불안과 위기, 파괴의 징조와 같은 암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넘치는 생명력, 죽임과 살림의 새로운 전환이라는 다소 긍정적인 느낌도 받는다. 자연은 파괴와 생성이라는 야누스적 얼굴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탠들의 작품들이 밝고 화사한 자연이 아니라 인류가 지속적으로 문명화를 추구하면서 야기해 온 ‘위기의 자연’을 더 강렬하게 인식시킨다는 점이다.


녹색과 파랑, 빨강과 노랑, 그리고 검정이 층층이 섞이면서 흩날리듯 형성된 이미지는 생성과 소멸을 함축하는 자연의 순환과 그 역동을 드러낸다. 동물들을 그리기 전, 그렇게 완성된 화면은 놀라운 생명 에너지를 분출한다. 휘몰아치는 먹장구름과 붉게 물든 노을, 푸른 바닷 속 해초들과 가시덤불은 색으로 응결한 자연의 실체이기도 하다.

 

새의 언어 ; 생生의 날개 짓


색채가 만들어 낸 자연의 추상적 풍경을 불길한 예감으로 이끄는 것은 동물들이다. 물고기, 새, 가재, 늑대, 인물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새들이다. 새들은 바탕이미지의 ‘생명’ 에너지만큼 충동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평온한 일상의 평화로운 장면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날거나 날아오르고, 내려앉고, 도망치며, 쫓겨나는 새들의 날개 짓은 회화적 느낌을 더 확고하게 자극하는 장치들이다. 특히 다른 새들에 비해 더 자주 등장하는 두루미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새들이기에 그 파닥거리는 몸짓이 좀처럼 편안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새들의 날개 짓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훌쩍 뛰어 솟아오르거나 웅크리고, 두 날개의 유연한 몸짓으로 활짝 펴거나 구부린 두루미의 행위는 격렬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퍼포머들을 연상시킨다. 새들의 동세는 우리가 흔히 달력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 따위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 직면한 ‘찰나적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은유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여, 새들의 날개 짓은 생의 언어, 즉 ‘살림’의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때의 ‘살림’이란 ‘죽음’이 아니라 ‘죽임’에 맞서는 의미로 사용된다. 죽음은 상황의 ‘결과’적 개념이지만, 죽임은 ‘과정’적 개념이다. 작품 속의 새들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임’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들은 ‘생태비평’의 맥락을 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중심적 철학과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세계 인식으로는 당대에 처한 생태, 환경위험을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지구 중심적이어야 하며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적 세계 인식이 필요하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평화공존의 생태적 삶을 복원하기 위한 저항, 그 저항이 ‘생태비평’의 핵심이다. 그런 이유에서 헤르만 스탠들의 회화는 새들의 저항이 아니라 자연의 저항이며, 동시에 인간의 저항이다.

 

나는 그의 작품들이 ‘해답’이나 ‘타협’을 주장하는 따위의 전략이 아니라 자발적 느낌을 통해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몇 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동적 상태에서 다만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은 조용히 귀를 열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 전하는 말보다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공감각적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각과 청각, 촉각 등 본능적 감각을 연다면 자연이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탠들의 회화는 바로 그 언어들로 구성된 생생한 자연의 시편詩篇들이자 운율일 것이다.

 


Posted by 인씨투 액트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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