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박물관 기증 작품에 부치는 글


1987년의 한국현실을 직조할 때 가장 먼저 새겨야 하는 것은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박종철 고문치사일 것이다. 이 사건은 변혁의 불씨를 온 들녘으로 확산시킨 기폭제이자 민주주의의 깃발을 주검으로 들어 올린 신호탄이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우리를 당혹케 하고 피폐한 절망의 바이러스를 유포시켰다. 그러나 그런 슬픔의 밑바닥에서 발견한 것은 더 깊은 허무가 아니었다. 모리스 블랑쇼가 근대성이 쌓아 올렸던 거대한 이념의 잿더미에서 이성을 내려놓고 존재의 바깥으로 향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그 스스로를 추방하여 예술의 바깥에 머물고, 바로 거기, 바깥에 선 타자를 재사유하여 세계변혁의 미학을 응결하기 시작했다.


1979년 비판적 현실주의에 기반 한 반모던, 탈매체, 탈제도, 탈권위적 작품으로 민중미술의 새 장을 연 <현실과 발언>의 동인이었던 김정헌은, 권인숙과 박종철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의 반인권적 패륜에서 민주주의의 붕괴를 목도한다. 그리하여 그는 예술의 바깥으로 가 정치독재, 관념독재, 자본독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의 미학’을 길어 올린다. 1987년 2월 개최된 <반고문전>에 출품된 <인권삼존불>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이 작품은 ‘삼존불’과 멕시코 혁명 화가였던 다비드 시케이로스의 벽화의 한 장면을 혼용한 것이지만, 역사적 현실이라는 리얼리티에 의해 이 작품은 생동하는 불의 미학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미륵이라는 삼존불의 원형에서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활활 타는 저 불은 다비의 불꽃이면서 동시에 폴 엘뤼아르가 노래했듯이 ‘동지가 되기 위한 불’,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비판적 현실주의로부터 개념적 현실주의로 전유한 일군의 작가들에서 김상돈은 가장 눈에 띄는 작가다. 그는 근대적 공간 구축에 총력전을 펼쳤던 20세기 한국사회의 이면을 자주 기웃거린다. 그런, 천연덕스러운 그의 태도는 그가 발견한 이미지들의 기표에서 자주 ‘황홀한’ 미의식으로 전환된다. 실상 그 황홀경이란 것은 현실 유토피아나 멋진 신세계를 지향했던 그 사회와 그 사회의 주체들이 만들어낸 기이하고 낯선 키치적 풍경들이다. 이번 기증 작품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작품들은 수십 년간 동두천에 주둔했던 미군들과 상관한다. 딱히, 그야말로 ‘멋진’ 추억이랄 것도 없는 주둔지의 기억이 총과 칼, 휘장의 기념품으로 변환된 그것들. 김상돈은 그 오브제들이 발산하는 알고리즘의 파편들에서 미군의 평화인상이 아닌 전쟁과 폭력의 아우라를 몽타주하고 있음이다.




김종길 | 미술평론가. space9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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