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 겨울호

2010.10.28 14:06 from 분류없음

황해문화 겨울호를 위해 <행궁동 사람들>의 리뷰 원고 앞부분을 새로 고쳐썼다.




공감하라, 그래야 공존할지니

- 공공미술의 공공성과 ‘공감’의 뒷담화를 위하여

 

   

9월26일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에 이화마을의 날개벽화가 떴다. 방송이후, 이승기처럼 날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급기야 주민들은 벽화를 지우라고 작가에게 요구했다. 작가는 “다들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우리의 즐거움이 누군가의 상처와 불편을 담보했다”며 10월 4일 결국 벽화를 지웠다. 이 사건으로 공공미술이 뉴스의 이슈가 되었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새천년을 맞아 ‘미술의 해’라고 호들갑 떨며 ‘공공적’ 미술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때가 벌써 10년 전인데, (위의 뉴스와 상관없이) 사실 최근에 와서야 공공미술의 진정성이 언급되는 듯하다. 중앙 정부 중심의 공공미술지원 사업이 지방 정부로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양상이지만, 실제로는 공공미술이 아트레지던스나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들과 혼융되며 나타나는 ‘충격파’일수도 있다. 이제 와서 공공미술의 공공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공공성의 핵심이 무엇인지, 왜 공공미술이어야 하는지 따져 묻는 것은 뒤떨어진 시대의식일 수 있으나, 어쩌면 이 시기가 가장 적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하는 존재, 인간


최근 번역 출간된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주요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책의 정식 출간일이 10월 10일이니 불과 일주일 사이에 여론이 움직인 것이다. 그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경쟁사회의 저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리프킨은 사회진화론의 핵심적인 키워드였던 ‘적자생존’이 21세기와는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폐기하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시대의 사회구조는 2백년 가까이 변함없는 키워드였던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며, 그것은 사람들 간의 ‘공감(共感. empathy)’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는 생물/유전학자들이 최근 인간들의 공감의식을 가능케 하는 ‘공감뉴런’(empathy neuron. 거울신경세포)의 발견에 주목했다. 거울신경세포를 통해 인간은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개념적 추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뮬레이션을 통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에 따르면, ‘공감’은 남의 아픔에 대해 ‘참 안됐다’하며 동정(sympathy)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 감정이입 수준까지 가면서 ‘같이 아픔을 느끼는’ 수준의 경지다. 다시 말해, 공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이를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며, 수동적인 입장의 동정과 달리 적극적인 참여로 나타난다. 리프킨은 인간이 그런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공감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1차적 특성이라 생각한다. 정리하면,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 곧 ‘호모 엠파티쿠스’라는 얘기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다윈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다윈주의가 인간의 충동을 자신의 개인적 생존과 번식을 보장하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의 구현에서만 찾는 한계를 비판했다. 그는 그것을 토대로 21세기 새로운 세계의 체제를 예지했는데, 즉 ‘적자생존’과 ‘경쟁’, ‘부의 집중’을 부른 낡은 경제 패러다임 대신 이제 세계는 ‘협력과 네트워크, 오픈 소스, 경제적 이타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체제, 곧 ‘분산 자본주의’라는 제3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리프킨의 ‘공감’개념은 현 단계 한국 공공미술이 상실한 핵심어이다.

 

소통공간을 위한 미술, 공공미술


‘공공미술’은 근대적 미학개념으로 볼 때 불합치 개념이다. ‘공공’의 개념과 ‘미술’의 개념이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미술에 있어서 ‘공공성’의 개념을 소유(컬렉션)와 향유(전시)의 차원으로 구분한 뒤, 향유의 개념에서 추출해 낼 수도 있겠지만, 미술작품을 다수의 공공이 소유하고 향유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근대미술관의 출현과 더불어 미술관의 공공성에 대한 담론이 성장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미술관이었지 미술 자체의 공공성 담론과는 무관했다. 또한, 근대이전까지의 교회미술에서 공공적 개념의 미술활동을 살펴볼 수는 있겠으나 근대를 거치면서 미술은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자율성을 획득했다. 미술의 종교적 창작활동(천정벽화, 성당 외벽 장식조각, 유리그림 등)을 21세기 공공미술의 개념에서 이해하는 것 또한 엄밀히 말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것은 공공미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미술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사회적 공공성이 강조되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초반에 완성된 사회주의리얼리즘 이론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 통일적 창작방법으로 확립된 문학예술의 방법으로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노동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는 예술의 자율성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술은 ‘역사적 구체성’이라는 사실주의 묘사방법론을 취해야 하며, 그것은 노동자를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를 목표 삼는다.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입각한 미술활동은 구 소련이나 동독, 중국, 쿠바, 북한 등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프로파간다(宣傳, propaganda)로서의 공공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프로파간다의 개념은 16세기 그레고리우스 13세 통치하의 로마에서 ‘신앙의 보급’(데 프로파간다 피데)을 위한 교단이 설립되었는데, 이때의 라틴어 ‘프로파간다’를 말 그대로 ‘선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상의 포교활동이 현재 프로파간다의 어원이며, 사회주의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단 얘기다. 그들은 공공적 공간에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한 벽화, 조각, 문장 등을 그리고 만들고 새겼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을 위한 미술이었지 결코 인민 대중을 위한 미술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의 공공성은 국가주의적 공공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주지하듯 공공미술(Public Art)은 공공의 대중을 위해 제작되고 소유되는 미술품이다. 한마디로 그 작품이 어디에 있고, 어떤 작용을 하며, 무슨 내용을 가졌던 간에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면 공공미술에 해당한다. ‘대중을 위한’이라는 대전제 안에서 그 미술은 자율성과 상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1967년 『도시 속의 미술(Art in a City)』에서 공공미술의 개념을 처음 사용했던 존 윌렛은 미술계 소수 전문가들의 예술적 향유가 일반 대중의 미감을 대변하는 것처럼 만들어 소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역설적으로 일반인들의 정서에 개입하는 미술개념으로서 공공미술을 생각해 냈다.


이후 공공미술은 ‘장소에 결합하는 예술’, ‘스트리트퍼니처’, ‘환경조형물’ 등과 같이 일종의 오브제 설치미술로 이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그 개념이 사회적 비판성을 내포한 미디어아트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제니 홀저(Jenny Holtzer)의 전자게시판 문자 작업과 바버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광고판 작업, 건축물에 문명 비판의 영상을 만든 크리지스토프 우디츠코(Krzysztof Wodiczko)의 프로젝션 작업 등은 공공성에 대한 공간과 장소의 역할을 심화시키면서 ‘발언’의 심도를 높이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공공미술이 실현되는 장소를 단지 물리적 장소로만 보지 않고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소통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소통에서 공감으로


기업의 사회환원프로그램으로서 공공미술이 사용되고(포스코는 포항시 공공미술 활동을 지원했다. 그 외 여러 유형이 있다.), 정부의 소외계층 환경개선 사업으로 공공미술이 사용되며, 심지어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공공미술을 투입하고 있다(문화부의 공공미술추진사업과 문전성시프로젝트사업이 그것이다.).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는 안양시가 공공성 확장과 문화도시를 위해 전략적으로 기획한 것인데, 이와 유사한 공공미술 지원 사업은 이미 전국적이다. 그러나 기업과 정부주도의 이런 공공미술이 과연 대중을 위한 공공성을 확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970년대 이후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을 주창하며 그 실천의 최전선에 있었고, 최근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의 사회적 미술로서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잔 레이시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개념은 “참여에 기초하며,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관하여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로 1960년대의 대항 문화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공공미술의 성격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때의 공공미술은 미술가와 관객 사이의 열린 소통과 상호 작용을 적극적으로 지향한다. 그는 공동체 예술을 꿈꿨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지역 주민들과의 협업을 중시했고, 사회적인 현안들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미 우리시대에도 당면한 문제들인 노숙자, 실업, 에이즈, 증가하는 노년인구, 이민자, 성/인종 차별, 도시민들의 소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는 예술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관심과 시대에 정합하는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작업 속에 융합시키면서 예술, 사업, 산업, 미디어, 노동, 사회사업 간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다.


한국의 공공미술이 보다 현실에 뿌리 깊게 안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취했던 공동체 예술로서의 ‘커뮤니티 아트’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공공미술에서 다뤘던 현안들에서도 주목해야만 한다. 한국에서도 그들과 유사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주의 공공미술로서의 공동체 예술론에 덧붙여 ‘공감의 미술’이 되기를 생각해 본다. 사회적 이슈나 현안들을 공공미술의 의제로 설정한 뒤 공동체 예술로 저항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행동주의 공공미술이 예술가와 지역주민, 공무원, 정치인 모두가 공감하는 미술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공공미술은 결코 공공성을 획득할 수 없다.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미술의 사회적 공공성으로 등장한 벽화나 조형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환경조형물과 무엇이 다른가. 기념비적 공간과 장소에 세워진 수많은 조각들, 공공적 장소라 불린 광장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환경조형물들, 공항과 지하철, 학교와 거리에 그려진 벽화들은 정치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들은 교도적이며 훈육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프로파간다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수많은 공공미술조차 예술가들의 독단과 과잉 미의식, 허위에 가까운 공동체성으로 빚어진 쓰레기가 많다. 그런 것들에는 눈곱만큼의 공감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공미술은 공감의 미술이어야 하고,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설령 융합과 충돌의 개념적 결과가 과거의 공공미술과 다른 새로운 공공미술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공감’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Posted by 인씨투 액트 트랙백 1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