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한국사회와 풍자의 ‘은유적 현실’

- 설총식의 동물 의인화 기법과 신형상 조각론

 

신형상 조각과 특징 : 현실적 은유와 풍자


2009년의 조각계를 개괄, 정리하며 나는 2000년 이후 한국 조각계의 한 특징이 신형상주의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신형상 조각과 신개념 조각은 2000년 이후 후기 신세대 조각가들에 의해 실험된 탈근대적 전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대적 지층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을 이룬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사회변혁 운동에 동참했던 민중미술로부터 비판적 현실주의의 미학을 전수받았고, 컬러텔레비전의 등장과 88서울올림픽,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현란한 이미지 속에서 ‘탈-모던, 탈-제도, 탈-권위’를 내세웠던 당시 청년작가 세대의 ‘신세대론’을 흡수했으며, 대안공간의 ‘얼터너티브 정신’을 형성했다. 또한 인터넷의 일상화와 글로벌 네트워크는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세대론(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의 편협성을 확장해 글로벌 후기 신세대(1990년대 후반 이후~현재)로 층위를 구성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한국미술2010』(월간미술) 그리고 신형상 조각의 기수로는 이원석을 필두로 박장근, 설총식, 이종희 등을 내세웠다. 이들의 신형상조각론을 잇는 후기 신형상 조각이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들에서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신형상 조각의 특징은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에서 현대 형상조각의 계보를 잇는 권진규, 심정수, 최병민, 임송자, 김광진, 정현, 류인, 배형경, 박희선, 이원경, 구본주 등의 형상조각이 표출했던 존재에의 자각, 시대현실의 응축, 인간형상에 대한 심미적 깊이, 전통과 역사에의 침윤 등의 상징을 계승하되 새로운 조형언어로 전환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형상 외부의 시각적 장치가 화려해졌다는 점이다. 선배 세대들의 작품들이 형상성 자체에 대한 탐구로 인해 주제나 형상 모두 대체로 어둡고 무거웠던 것을 상기해볼 때, 이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밝다. 그것은 다양한 채색기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존재와 시대현실에 대한 비판적 현실주의의 개념을 놓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논쟁적인 내용에서도 그렇다. 둘째, 은유와 해학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이다. 주로 인체형상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변형, 파괴를 통해 ‘발언’했던 앞 세대와 달리 이들은 우화적 형상을 곧잘 도입한다. 우화를 통한 현실적 은유와 풍자는 이전 조각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신형상주의 조각의 보편이다. 셋째, 위의 두 특징을 잘 드러내기 위해 작가들이 즐겨 취하는 방식인데, 전시공간연출을 극적인 구조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한 조각의 상징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천착했던 독립적 형상성에서 군상이나 집단 혹은 스토리텔링에 의한 극적 장치를 구상한 뒤, 이를 전시연출로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관객과 더불어 소통하려는 ‘참여적 적극성’이 아닐까 한다. 설총식의 경우, 위의 세 가지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정을 통해 여기에 이르렀을까?






모순에 찬 한국사회의 풍자 : 동물 의인화


학생시절인 1994년 <거리미술전 전야제>에 참여하며 현실적 조형감각에 눈떴던 설총식이 1996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기까지의 여정은 “근본적으로는 나의 환경과 인간으로서 갖는 실존성,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변증법적 유물론적 시점”(첫 개인전 도록에 실린 작가노트)이라는 고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러니까 1997년부터 2002년까지는 한국사회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이를 극복했던 심각한 경제위기의 시기이다. IMF가 “세계무역의 안정된 확대를 통하여 가맹국의 고용증대, 소득증가, 생산자원 개발에 기여”하기 위해 탄생하였다고는 하나 ‘세계무역의 안정된 확대’라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대의 촉진은 결국 수출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한국경제가 얼마나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졸속 성장 전략에 의해 기형적으로 비대해 진 상황에서 누적된 무역적자라는 허기를 견디지 못해 결국 기절초풍으로 쓰러진 형국이면서, 동시에 천박한 자본주의 졸부들이 그저 먹고살만해 졌다고 물 쓰듯 돈을 쓰다 쪽박 찬 스토리이기도 했다. 애면글면 죽어나는 것은 대다수의 민중들이었다. 자발적이든 타발적이든 수년간 지속된 강도 높은 경제개방과 구조조정으로 기업파산이 줄을 이었고, 그로인한 심각한 불경기와 실업사태는 한국사회가 어떤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하는지 되묻게 만들었다. 350만 명의 국민이 약 21억 3천 달러어치의 금을 모았던 이때의 기적적인 사건은 사실 기적이 아니라 못난 국가를 탓하지 못한 민중들의 뼈아픈 통한일 터.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의 사회변혁운동과 1990년대 후반의 자본주의 세계화 모순을 스무 살과 서른 살의 나이에 겪어야 했던 설총식은(그는 1968년생이다.), 그가 대학시절 학습했던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dialectical materialism)’으로서의 세계를 피부로 인식하게 된다. 한 마디로 그것은 모순에 찬 세계의 사유철학인 변증법의 논리로서만 해석 가능한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와 역사, 그리고 그 세계 내의 자기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이었다. 가족의 절대적 가치를 위해 힘겹게 자신을 낮춘 어느 청소부의 초상을 통해 숭고의 미를 표출한 <청소부 K씨 가정을 위한 중도>나 IMF 직전의 실직자가 벌거벗은 자신을 상품으로 내 놓은 <Sale '97>, IMF를 아버지들의 세대인 ‘기성세대’의 처절함으로 상징화 한 <비명>, 세기말의 불안과 실존적 두려움을 탁월한 형상성으로 묘파한 <세기말 비가>, 그리고 샐러리맨의 한계상황을 자본의 낚시 줄에 걸린 물고기로 은유한 <무제>는 바로 IMF전후의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한 수작들이며, 이때 이미 그의 신형상 조각의 조형언어가 형성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타 조각가들에 비해 우화적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그의 비장의 전술, ‘동물 의인화’를 통한 인간 풍자의 조형작품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예컨대, 무한 경쟁사회의 기득권 싸움을 양장입고 꽉 다문 표정으로 묵묵하게 앉아 있는 두꺼비형상에 비유한다거나(<자리>), 북어대가리처럼 입을 쩍 벌린 채 낚시 바늘에 꿴 샐러리맨 물고기들이 그것이다(<무제>). 이후, 그는 구본주식 형상조각에서 벗어나 그 자신의 독자적 작풍(作風)이랄 수 있는 동물 의인화 작업을 심화시킨다. 참, 그가 실직의 시대를 풍자했던 첫 개인전의 주제는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2002. 관훈갤러리 신관 2층).

 




은유적 현실 : 인간 사회학과 비판적 현실주의의 뼈대


첫 개인전을 치룬 뒤, 그는 IMF와 더불어 급속하게 상실해 가는 ‘가장의 권위’에 대해 고민한다. 21세기 벽두부터 언론에 오르내린 40대 가장의 실직과 명예퇴직(일명 명퇴),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사,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흡연, 살아남기 위해 줄타기의 명수가 되어야 하는 이 기인들의 모습은 IMF를 건너 온 멋진 투사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렵게 살아남았던 직장은 그들의 존재감을 부담스러워 하고, 겨우 견뎌낸 가족의 빈곤은 날로 커져만 가는데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자리 만들기>(2004. 관훈갤러리 특별전시관)라는 주제어를 끌어 올려 두 번째 개인전을 치른다. 다섯 유인원으로 분장한 다섯 아버지의 형상은 이 시대 가장의 당당한 풍채(風采)가 아니라 자기 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혹은 자리 확보를 위해 온갖 처신을 구사하는 슬픈 초상이다. 그들의 몸짓과 표정은 처연하다. 심리적인 불안감과 공허함이 가득한 눈빛이 그렇고, 공세적이지 못한 꿈 뜬 동작이 그렇다. 그들은 거울을 보듯 세상을 보고, 구경꾼이나 방관자처럼 무언가를 관망하며, 아무것도 없는 중심을 향해 으르렁 거린다. 그들에게서 ‘남성 중심사회’ 권력자의 폭력적 위풍당당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2005년, 첫 개인전에서부터 선보인 동물 의인화의 전 작품을 전시한 <은유적 현실>(갤러리 도올)은 그가 그렇게 은유하고 풍자해 온 현실에 대한 재성찰의 계기였다. 이미 전시 제목에서 예감했듯이 그는 자신의 동물 의인화 작업을 ‘은유적 현실(Metaphorical Reality)’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우화적 상상이나 가벼운 풍자, 해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첨예한 현실이란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은유적 현실’은 우화이되 인간 사회학의 관점을 상실하지 않으며, 풍자이되 비판적 현실주의의 개념적 뼈대를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은유적 현실’이라는 개념정립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2007년, ‘은유적 현실’에 ‘콤플렉스(Complex)’를 부제로 단 관훈갤러리 신관에서의 제3회 개인전은 해석 가능한 현실적 풍경을 역시 동물 의인화를 통해 재현했다. 작품들은 이전보다 더 컬러풀해졌고, 의인화 한 동물들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The walker>만 보더라도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그가 채색에 매달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곰에서 고양이, 제비, 사자, 뱀, 부엉이로 이어지는 동물 형상의 선택은 메타포가 훨씬 깊어졌음을 말해준다. 곰이 부지런한 뚜벅이를 표현한 것이라면, 고양이는 날렵하고 간사한 것을, 제비는 ‘철새 정치인’이라 부르듯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집시를, 사자는 남성성에 깃든 성적 욕망과 폭력을(뱀은 사자의 성기로 표현된 것이다), 부엉이는 밤을 잊고 노동하는 예술가를 은유한 것이다. 각각의 동물들이 내포한 은유적 상징을 적절한 동세와 표정으로 형상화 한 것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자화상


2010년 올해 전시는 2007년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러니까 ‘은유적 현실’의 대주제 아래서 그가 이번에 탐색한 세부주제는 ‘욕망과 관계’이다. 이 세부주제를 그는 다시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눠 표현했는데, 첫째는 물질 만능주의, 속물주의에 맹신하는 인간들의 욕망을 그린 것으로 카라칼이라는 고양이 낚시꾼이 물고기 인간을 낚는 것에 비유했다. 그 옆으로는 팜 파탈(femme fatale)의 사마귀(양귀비를 연상케 하지만 결단코 그녀의 풍만한 여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의 농염한 자태가 ‘유혹’의 상징으로 서 있다. 첫 개인전에서 등장한 바 있는 물고기 인간이 여기에서 재등장하는 재미가 있다. 그는 마른 북어처럼 거의 무방비적 상태로 걸려 있는 <무제>와 달리 여기선 낚시 바늘을 향해 두 손 벌리고 달려드는 ‘욕망’의 화신들로 묘사하고 있다. 물질이 곧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는 현 시대의 인간상에 대한 비참한 통찰일 것이다. 우리는 세대를 호칭할 때 해방동이 세대, 베이비 붐 세대, 4.19세대, 386세대, X세대와 같은 어법을 통해 한 세대의 역사성과 그 시대현실의 정치성 등을 상상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88만원’ 세대와 같은 자본 상징어가 통용되면서 비정규직, 청년실업률, 최저임금과 같은 키워드로 그 세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세대들에겐 자본획득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며 진리인 것일까? 물고기 인간은 그런 청년 세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둘째는 남녀의 삼각관계를 한 마리 여우(여자)와 두 마리의 늑대(남자)로 표현하고 있다. 관계로서의 여자와 남자는 늘 호의적이면서 동시에 적대적이다. 호의적인 것과 적대적인 것의 상대성은 사실 다르면서 같다. 늑대로 의인화 된 두 남자는 이 양면성의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는 때때로 우호적이나 느닷없이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우는? 그가 연출한 장면에서 여우는 남자들의 그런 관계의 바깥에 서 있다. 관계의 지형 안에 있는 듯하나 그는 독립된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는 사실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이다. 세 번째는 시간에 대한 성찰을 다룬 것으로 사막여우와 나무늘보가 등장한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발을 디딘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막여우의 표정은 해 맑다. 느린 시간의 결을 오롯이 마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사막일 터인데, 사막여우로 형상화 된 인물은 그래서 마치 참선에 든 수도승처럼 그윽하다. 시계바늘 위에 올라 탄 나무늘보 또한 다르지 않다. 그는 유유자적의 세계를 어슬렁거리는 듯하다.


설총식의 이번 작품들은 우리가 아직도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나는 해 맑은 사막여우에서조차 희망의 돛을 발견하지 못한다. 남북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의 더 큰 관계들은 적대적이지 못해 안달이고 청년 실업률은 위험수위에 육박하며, 사막을 향해 치달아가는 ‘폭도형’ 개발주의는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이다. 시계를 바라고 앉은 사막여우와 나무늘보는 멸종의 도래에 대해 경종 울린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 공감의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회, 공감의 언어를 상실하고 있는 사회, 2010년 한국사회의 자화상이 바로 설총식의 우화이며 우울한 풍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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